스파르타쿠스(Spartacus)는 고대 로마에서 활약했던 검투사이자 노예로, 자유를 얻기 위해 로마 제국에 대항해 싸운 인물이다. 스파루타쿠스의 일대기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노예 반란 중 하나로, 제3차 노예 전쟁(기원전 73-71년)으로 알려져 있다.
스파르타쿠스, 배경과 출생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자유인1이었으나, 로마에 의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고, 이후 검투사로 훈련받았다.
트라키아는 오늘날의 불가리아, 그리스, 터키 일부 지역에 해당하는 고대 국가로, 스파르타쿠스의 출생지는 이 지역의 마이디 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에서 복무한 경험도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군사적 경험이 나중에 그의 반란에서 큰 역할을 했으리라.
제3차 노예 전쟁과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에 카푸아의 검투사 훈련소에서 74명의 동료들과 함께 탈출하며 반란을 시작했다. 이들은 베수비우스 산에 은신하며 초기에는 소규모의 무리로 활동했으나,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며, 점점 더 많은 노예들과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 하층민들이 합류했다.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한때 수만 명에 달할 정도로 커졌고, 이로 인해 로마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뛰어난 전사이자 지휘자로, 로마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주로 기습과 매복을 활용해 로마군을 상대했으며, 로마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하는 등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그의 군대는 초기의 검투사와 노예들로 구성되었으나, 점차 더 많은 훈련된 병사들이 합류하면서 전력이 강화되었다.
스파르타쿠스의 최후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끝내 로마의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기원전 71년에 스파르타쿠스는 최후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그의 군대는 대다수가 포로로 잡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스파르타쿠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이는 그의 최후를 둘러싼 여러 전설을 낳았다.
후대에…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로마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노예 제도와 관련된 주제에서 빠지지않고 언급된다. 특히 스파르타쿠스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계몽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재평가되었고, 그의 이름은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추천 드라마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스파르타쿠스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잔인한 면도 있고 선정적인 장면도 있지만, 작품성 높은 드라마로 정주행 추천한다. (주말 사라짐 주의)
- 노예가 아닌 사람 ↩︎